[투데이픽]한국천주교 역사를 품은 내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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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투데이픽]한국천주교 역사를 품은 내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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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승인 2019년 12월 14일 09시 30분
  • 지면게재일 2019년 12월 14일 토요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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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진 솔뫼성지와 김대건 신부
천주교, 극심한 박해 속 성장
‘中 교류 관문’ 충청 순교성지 다수

한국 천주교는 극심한 박해와 순교자들이 흘린 핏속에서 성장해 왔다.

충청도는 중국과 교류 관문이라는 지리적 특성 때문에 내포지방이 한국천주교의 모태가 됐다. 그래서 이곳에는 순교성지도 많다.

내포지방에서 가장 뛰어난 선교활동을 한 인물로는 '내포의 사도'라고 일컫는 이존창(루두비코)를 꼽는다. 예산 여사울에서 1759년 태어난 이존창은 매우 열성적으로 선교활동을 했는데 여사울을 비롯해 홍성, 덕산, 이산, 공주 등지에 300가구가 천주교 신자가 됐다.

그 박해와 탄압 속에서 이와 같은 성과는 매우 경이적이었다. 뿐만 아니라 전라도 고산지방을 비롯해 경상도 청송, 예천 등 전국적으로 그의 발이 미치지 않는 곳이 없었다. 그러나 그는 체포돼 1801년 4월 9일 공주에서 참수형을 받고 순교했다.

무엇보다 내포지방 천주교가 자랑스럽게 생각하는 것은 이 지방에서 한국 최초의 신부가 탄생했기 때문이다.

당진시 우강면 송산리. 동네 이름이 '솔뫼'여서 '솔뫼 성지'하면 김대건 신부의 생가를 말한다.

역시 서해 바다가 인접한 곳이다. 그의 증조부는 이존창에게서 교리를 배우고 세례를 받았으며 이때부터 그의 집안은 모진 박해의 가시밭길을 걷게 된다.

1801년 신유박해 때 그의 증조할아버지가 체포돼 공주 감영에서 고문을 받고 이어 1805년 해미군영에 넘겨져 10년간 옥살이를 했다. 그러다 1814년 이곳에서 목숨을 잃었다.

김대건은 이런 가문에서 1821년 태어났는데 아버지는 김제준, 어머니는 고 우르슬라다.

15살 되던 1836년 12월 소년 김대건은 프랑스 선교사 모방(Maubant) 신부에 의해 신학생으로 선발돼 마카오로 보내졌다. 최양업, 최방제도 함께 선발됐는데 두 발로 걸어서 압록강을 건넜고 중국 대륙을 횡단하는 초인적인 역정이었다.

그는 신학뿐 아니라 라틴어, 역사, 프랑스어와 중국어 등 광범위한 새 학문을 접하고 매우 뛰어난 재능을 보였다.

그러나 함께 간 동료 최방제가 열병에 걸려 죽고, 고국에선 아버지가 1839년 기해박해 때 순교하는 가슴 아픈 일이 발생했다.

그런 가운데 1844년 12월 김대건은 최양업과 함께 부제품을 받고, 1845년 8월 17일 중국 상하이 김가항 성당에서 사제품을 받았으니 한국 최초의 신부가 된 것이다.

사제가 된 그는 그해 8월 31일 프랑스 선교사 페레올 주교와 다블뤼 신부를 태우고 서해를 건너 귀국하게 되는데 도중에 폭풍을 만나 제주도에 표류하는 수난을 겪고 가까스로 강경에 도착한다. 많은 고생이 있었지만 바닷길을 통한 선교사의 통로가 확보된 셈이다.

하지만 보다 안전한 항로를 확보하기 위해 백령도 근해를 탐색하다 순위도에서 관헌에 체포되고 만다.

8개월 동안 수 백리 길을 오가며 미사를 집전하는 등 열정을 바쳐 사제로서의 헌신을 다했지만 여기서 모든 게 멈추고 말았다.

조정에서는 지도 제작 등 그가 보여준 신지식에 깊은 존경심을 갖고 죽음만은 면하게 하려는 기류도 있었으나 갑작스레 프랑스 세실 함대가 충남 외연도에 출몰하는 등 사태가 악화돼 1846년 9월 16일 한강 새남터에서 군문효수로 처형됐다. 당년 25세였다.

1984년 한국을 방문한 요한 바오로 2세 교황은 한국 천주교 103위 순교자들을 시성했는데 이 때 김대건 신부를 맨 먼저 성인으로 올렸고 2014년 우리나라를 방문한 프란치스코 교황은 당진 솔뫼에 있는 김대건 신부의 생가를 방문하기도 했다.

이렇듯 모진 박해와 순교를 온 몸으로 겪은 내포의 천주교 선조들은 한국 천주교의 영광스런 밑거름이 됐다.

[변평섭의 충청 역사유람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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