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투데이 기고] 두려움에 맞서다 - 순국열사 안순득 여사를 기리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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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투데이 기고] 두려움에 맞서다 - 순국열사 안순득 여사를 기리며
  • 충청투데이
  • 승인 2020년 06월 29일 19시 30분
  • 지면게재일 2020년 06월 30일 화요일
  • 19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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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신주현 호서대학교 법경찰행정학부 특임교수.

신주현 호서대학교 법경찰행정학부 특임교수

고향이란 단순히 태어나고 자란 곳이 아니라 마음속 깊이 간직한 그립고 정든 곳이라고 한다.

눈감으면 떠오르는 낯익고 정겨운 동네, 어릴 적 모든 기억과 삶이 녹아있는 필자의 고향은 논산시 강경이다.

예로부터 강경은 우리나라 3대 시장의 하나이자 2대 포구로 그 전성기에는 거주인구가 3만여 명, 유동인구는 10만여 명에 달한 근대문화의 발상지라 할 수 있는 곳이다.

또 한국 최초의 침례교회인 강경침례교회와 일제의 신사참배를 거부한 강경성결교회가 소재한 곳이기도 하다.

필자는 어린 시절 학업 때문에 부모님과 떨어져 오랫동안 독실한 기독교인이신 외할머니와 함께 지냈었다.

그때 외할머니로부터 안순득 여사에 대한 이야기를 잠깐 들었던 기억이 난다. 강경 옥녀봉에 있는 안순득 여사 추모비에 의하면 안 여사는 당시 강경을 점령한 북한군의 끔찍한 고문과 협박, 회유에도 불구하고 배교(背敎)와 협력을 당차게 거부하고 마지막 죽음의 순간까지 믿음을 지키며 애국가와 대한독립만세를 외쳤다.

안 여사는 하나님께서 저들의 죄를 용서해주실 것과 자신의 최후를 맡기는 기도를 하시다가 공산 폭도들의 일곱 발 총탄에 맞아 순국 순교하셨다.

이는 오직 안 여사가 예수만 바라보며 살아가는 우직하고도 굳건한 믿음의 소유자였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조그만 이익에 눈이 멀어 자신의 원칙과 절개를 헌신짝처럼 버리고 세상에 영합하는 것을 ‘유연성’이라 포장하며 살고 있는 우리 후세들에게 안 여사의 이러한 우직한 믿음과 소신은 세상엔 어떠한 상황에서도 절대 구부려서는 안 될 원칙과 정도라는 것이 있음을 깊이 깨우쳐준다. 안순득 여사는 고통과 죽음 속에서 의미를 발견할 줄 아는 분이셨던 것으로 보인다.

2차 세계대전 당시 나치의 아우슈비츠 수용소에 갇혀 죽음의 벼랑 끝에서 살아나온 유태인 정신과 의사 빅터 프랭클은 “고통 속에서 의미를 발견할 수 있는 한 인간은 그 어떤 고통이라도 기꺼이 받아들인다”라고 술회한다.

당시 빅터 프랭클은 나치에 의해 수많은 유태인과 함께 나치의 강제수용소에 끌려갔다. 이들 중 빅터 프랭클을 비롯해 소수만 살아남고 거의 모든 사람들이 수용소 생활을 견디지 못하고 죽게 된다.

그가 말하는 아우슈비츠는 일상적인 욕설과 폭행, 비위생적인 환경과 혹한, 끝없이 이어지는 굶주림, 체력의 한계를 시험하는 강제노동, 옆에서 죽어가는 동료와 어디서 죽었을지도 모르는 가족에 대한 연민, 죽음이 자기 자신에게도 언제 닥쳐올지 모른다는 사실이 주는 미칠 듯한 공포 등 최악의 고통과 불안과 절망의 시간이었다.

그러면서 그가 내린 결론은 수용소에서 살아남은 자들은 나이가 젊거나 튼튼한 근육이 있어서가 아니라 자신의 삶과 경험에서 어떤 뚜렷한 목적과 의미를 발견함으로써 이에 맞설 힘을 얻었기 때문이라고 이야기한다.

마찬가지로 안순득 여사께서 공산 폭도들의 모진 고문과 회유, 죽음에 대한 두려움를 극복하고 순국 순교하신 것도 역시 고통과 죽음 속에서 그 어떤 숭고한 의미와 깨달음을 발견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고 생각한다.

안순득 여사의 순국순교정신과 죽음에 임박한 마지막 사생문답(死生問答)은 우리 지역 후손들에게 잊히지 않는 교훈으로 그리고 근대 강경 역사문화의 한 페이지로 영원히 기록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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