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인네들하고 한 약속은 잊어버리는 거 아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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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인네들하고 한 약속은 잊어버리는 거 아냐”
  • 충청투데이
  • 승인 2020년 09월 10일 17시 03분
  • 지면게재일 2020년 09월 11일 금요일
  • 8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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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경원 한국효문화진흥원 총무부 대리
▲ 서경원 한국효문화진흥원 총무부 대리

"노인네들하고 한 약속은 잊어버리는 거 아냐. 젊은이들한테는 다음 달, 내년도 있겠지만 노인네들에게는 지금뿐이라고"

내가 초등학생 때 봤던 만화 '보노보노'에서 포로리 아빠가 약속을 어긴 게 아니라 잊어버린 거라고 말하던 포로리에게 했던 말이다. 내가 초등학생 때 봤던 만화가 이렇게 철학적이었나 싶은 생각이 들 정도로 인생을 꿰뚫는 대사였다.

얼마 전, 환갑을 맞아 오랜만에 만난 초등학교 친구들과의 여행에 아버지께서 한껏 기분이 좋아지셨다. 아버지께서 찍어 오신 사진을 정리해 드리면서, 친구분들과 옛날얘기를 또 하고, 또 하고 반복하시면서 얼마나 즐거워하셨을지 눈에 선했다. 아버지는 내년에 꼭 다 같이 다시 여행을 가자고 약속을 하셨다고 했다. 그러면서 건강히 지내라고, 그래야 내년에 또 본다고 재차 말씀하셨을 것이다. 아버지들의 내년 약속에 뭉클했다. 50년 우정을 나누는 60세 부모님들의 약속.

하지만 우리는 어르신과의 의미 없는 거짓 약속을 반복한다. 명절 때마다 할머니, 할아버지에게 다음에 또 오겠다는 약속을 하고, 일이 있어 못 가게 되었다고 거짓말을 한다. 어르신들에게 미움받거나 상처를 주지 않기 위해. 하지만 그러는 사이 이분들 이마의 주름만큼 우리의 마음에도 주름이 진다. 그 주름을 펴는 일은 세월이 하는 게 아니라 솔직함이 하는 일이다. 줄곧 어르신들에게 솔직하지 못했던 나 자신을 떠올리면 마음이 무겁다.

노인은 노인이 되고 싶었을까.

아니면 노인이 되어버린 걸까.

노인은 노인이 된 자신이 마음에 들까.

아니면 노인이 되지 않았을 젊었던 날들을 꿈꿀까.

어렸을 때는 보이지 않았던 깊이 있는 문장들이 이제야 보이고 또 이제야 느껴지는 이유는 무엇일까? 지금 내가 아주 조금은 인생에 대해 알아가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아직 노인들과 솔직하게 약속하고 지킬 수 있는 날들이 많이 남아있다. 나의 코흘리개 시절을 기억해주고, 나의 청소년기, 대학 시절을 기억해주고, 나의 앞으로의 날들을 기억해 줄 부모님이 계신다. 얼굴이 크게 나와도, 흔들려도, 표정이 어색해서 지우고 싶은 사진도 다 간직하고 계시는 나의 부모님이 계신다.

언젠간 나도 부모님이 보고 싶어서 가슴이 미어질 때가 올 것이다.

하지만 지금은 최대한 모르고 싶다. 그래서 나는 노인과의 약속에 솔직해지고 싶다. 처음에는 어색하고, 미움을 받더라도 그게 더 나은 선택이라고 생각한다. 새롭게 맺어질 노인들과의 약속을 거짓말 뒤에 석연치 않은 기억으로 남기지 않고, 아낌없이 추억으로 만들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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