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청역사유람] 직원들이 숨기고 지킨 '옛 보물' 한국전쟁 버틴 공주박물관
상태바
[충청역사유람] 직원들이 숨기고 지킨 '옛 보물' 한국전쟁 버틴 공주박물관
  • 충청투데이
  • 승인 2020년 09월 10일 19시 28분
  • 지면게재일 2020년 09월 11일 금요일
  • 9면
  • 지면보기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94 공주박물관의 위기
日 내선일체 내걸고 선광사 건립 추진
불상 보관하느라 박물관 기능 중단 돼
6·25 한국전쟁 때 직원들 대비 못해
피란 포기… 유물 뒷산 방공호에 숨겨
인민군 점령, 1·4 후퇴 잘넘겨 무사
▲ 국립공주박물관 웅진백제실. 국립공주박물관 제공

[충청투데이 충청투데이] 1932년 충남도청을 대전에 빼앗긴 공주는 몹시 허탈상태에 빠졌다. 공주 읍내에 빈 집이 700호에 이를 정도로 인구도 급격히 줄었다.

그래서 그 보상책으로 나온 것이 공주 금강 철교 건설과 공주 박물관, 그리고 농업학교를 세우는 것이 엇다. 특히 박물관 세우는 것은 일본인 충남도지사 오까사끼가 발 벗고 나섰다.

오까사끼 지사는 먼저 '공주 사적 현창회'라는 기구를 만들어 박물관 준비 작업을 하게 했는데 도지사 자신이 회장을 맡았다. 무엇보다 유물 수집하는 일과 건물 마련하는 것이 중요했다. 건물은 옛날 충청도 관찰사가 집무하던 '선화당'(宣化堂)으로 정했다. 이 선화당의 마지막 관찰사는 최정덕으로 1910년 조선왕조가 막을 내릴 때 까지 재임했다. 이렇게 하여 1940년 4월 공주 사적 현창회는 이름을 바꾸어 '공주 박물관'으로 정식 출범했다. 초대 관장은 유시종.

▲ 국립공주박물관 웅진백제실.  국립공주박물관 제공
▲ 국립공주박물관 웅진백제실. 국립공주박물관 제공
▲ 국립공주박물관 웅진백제실.  국립공주박물관 제공
▲ 국립공주박물관 웅진백제실. 국립공주박물관 제공

그런데 공주 박물관이 일시 문을 닫은 적이 있다.

일본은 조선과 한 뿌리, 한 몸이라는 소위 '내선일체'(內鮮一體)를 내걸고 일본 불교 '선광사'를 공주 곰나루 자리에 세우기로 했다. 그리고 선광사를 완공할 때 까지 일본서 가져 온 불상을 공주 박물관에 보관한 것이다. 따라서 이 기간 박물관은 그 기능을 중단할 수밖에 없었다. 물론 공주에 일본 불교가 들어오는 것에 대해 반발이 거세게 일어났다. 3·1 운동의 33인 민족대표 중 한 분이며 시인인 만해 한용운은 '선광사 기둥 하나도 이 땅에 박아서는 안 된다.'며 앞장 서 반대했고 공주에 사는 유지들도 연판장을 작성, 일제 당국에 전달하기도 했다. 결국 2차 대전이 막바지에 이르면서 선광사 건립은 중지되고 공주 박물관은 다시 문을 열게 되었다.

공주 박물관의 최대 위기는 6·25 한국전쟁 때.

박물관 직원들은 북한의 남침이 곧 격퇴되리라는 믿음으로 미처 전쟁에 대비하지 못한 채 7월12일 바로 옆 금강에서 전투가 벌어지는 것을 목격해야 했다. 김영배 관장을 비롯, 직원들은 피란을 포기하고 유물을 지키기로 결심하고 중요한 문화재급 유물들을 포장하여 뒷산 방공호에 숨기는 작업을 했다. 그러나 포탄이 방공호 근처까지 떨어져 폭발하는 바람에 크게 놀라기도 했다. 다행이 포탄이 방공호는 피해가 유물들은 잘 보존될 수 있었다. 인민군은 7월16일 금강을 도하, 공주를 점령했고 박물관을 접수 '공주인민위원회' 간판을 걸었다.

▲ 국립공주박물관 충청남도 역사문화실.  국립공주박물관 제공
▲ 국립공주박물관 충청남도 역사문화실. 국립공주박물관 제공
▲ 국립공주박물관 충청남도 역사문화실.  국립공주박물관 제공
▲ 국립공주박물관 충청남도 역사문화실. 국립공주박물관 제공
▲ 국립공주박물관 충청남도 역사문화실.  국립공주박물관 제공
▲ 국립공주박물관 충청남도 역사문화실. 국립공주박물관 제공

이제는 미군의 폭격이 문제였으나 이 역시 잘 피해 나갔다. 김영배 관장은 매일 같이 나와 유물을 숨겨둔 방공호를 살피곤 했는데 인민군들은 무식한 탓인지 유물 같은 것에는 관심을 두지 않다가 미군의 인천상륙작전이 성공하자 재빨리 빠져 나갔다. 그러나 얼마 안 있어 중공군의 침입으로 우리가 후퇴를 해야 하는 '1·4후퇴' 에 직면하게 되었다. 이번에도 직원들은 피란을 가느냐 유물을 또 숨겨야 하는 지 고민에 빠질 수밖에 없었다. 그럴 때 안호상(安浩相) 문교부 장관이 피란길에 박물관에 들렀다. 그때는 박물관이 문교부에 속해 있었기 때문에 박물관 직원들은 구세주를 만난 것 같았다. 직원들은 장관의 팔을 잡고 유물을 어떻게 해야 할지 호소했지만 장관 역시 '나도 단신으로 피란 가는 몸이니…'하고 어떤 대답을 내놓지 못하고 훌쩍 떠나고 말았다. 다행히 중공군이 후퇴하는 바람에 공주 박물관 유물문제는 안전하게 되었지만 이렇듯 공주 박물관은 김영배 관장 등 몇 안 되는 직원들의 희생정신으로 위기를 이겨 냈다. <충남복지재단 이사장>

빠른 검색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