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교의 청량한 우정을 꿈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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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교의 청량한 우정을 꿈꾼다
  • 나재필 기자
  • 승인 2015년 11월 25일 19시 57분
  • 지면게재일 2015년 11월 26일 목요일
  • 21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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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청로]
▶BC 4세기경 로마는 압제의 제국이었다. 먹고 살기 힘들었던 민중은 절망했다. 차라리 세상이 종말하기를 바랐다. 유태인 목수의 아들 예수는 성난 군중에게 소리쳤다. “나는 이 세상에 평화가 아니라, 칼을 가져다주려고 왔노라.”(마태복음) 예수는 메시아라기보다는 강성 좌파였고, 연설을 잘하는 정치가였다. 요즘으로 치면 진보다. 예수는 지배계급의 돈줄이 되는 상행위에 분개해 상인을 추방했고 지배계급을 공격했다. 로마제국은 카리스마 넘치는 '정객' 예수의 노골적인 비토를 더 이상 묵인할 수 없었다. 결국 유다의 배신으로 붙잡힌 예수는 십자가형에 처해진다. 주변에 열두제자는 없었다. 그들은 목숨을 부지하기 위해 모두들 줄행랑쳤다.

▶종교를 폭력적이라고 말하는 사람은 없다. 대다수의 종교인들은 점잖다. 하지만 현실에서의 종교는 사납고 난폭하다. 종교로 인해 인류의 절반이 사멸했다. '하나님'을 믿는 종교가 만약 '하나'였다면 싸울 일은 없었을 것이다. 가톨릭, 기독교, 이슬람, 불교, 유대교, 힌두교…. 모두들 나의 신은 유일하며, 다른 신을 믿는 자는 적이라고 규정한다. '하나님'이 명하신 살생의 칼에 의해 최소 2000만명이 죽었다. 6만년 전 네안데르탈인 무덤에서 종교 흔적이 발견된 이후 인류에는 약 10만개의 종교가 있어 왔다. 이 중 몇 개만 살아남고 대부분 멸종하거나 사라졌다. 하나님이 흙으로 인간을 만들었다거나, 남자의 갈비뼈로 여자를 만들었다는 신화는 깨진지 오래다. 이제 정복자의 종교는 칼이 됐을 뿐이다.

▶푸른 바닷가에 주황색 죄수복을 입은 사람들을 무릎 꿇리고 검은 복면의 테러범들이 칼을 겨눈다. 핏빛 바닷물을 보여주며 이슬람 음악이 흐른다. 수니파 급진주의 무장단체인 IS가 이집트 콥트교도를 참수했다며 공개한 동영상이다. 제목은 '십자가의 국가에 보내는 피로 새긴 메시지'다. '지하드(Jihad)'는 지구촌 곳곳에서 테러를 자행하고 있다. 이슬람 경전 코란에는 신앙을 위한 싸움의 개념으로서 '1년 중 8개월간은 알라신이 아닌 다른 신을 믿는 자들과 싸워 파멸시키라'는 구절까지 있다.

▶사람들은 죄를 짓고 살아간다. 종교는 이 죄가 자신의 잘못인지, 아니면 타인의 잘못인지를 따지는 게 아니다. 그냥 반성하면 된다. 기독교에서는 회개라 하고, 천주교에서는 고해, 불교에서는 참회라고 말한다. 따지고 보면 이 모든 것은 옷 한 벌의 무게에 지나지 않는다. 그래서 성직자의 무게는 무겁다. 종교의 가장 큰 화두인 가난은 잘 보이지 않는다. 가난이 없어서가 아니라 가난을 무시하고 숨기고 억눌러왔기 때문이다. 종교는 가난의 민낯을 볼 수 없도록 갖가지 논리와 장치를 쉴 새 없이 작동하지만, 정작 본질은 냉담의 빙하를 걸을 뿐이다. 깨달음이란 익어가는 것, 고로 종교의 청량한 우정을 꿈꿔본다.

나재필 편집부국장 najepil@cctoday.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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