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때그사람]60년대 가요계 신데렐라 권혜경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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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때그사람]60년대 가요계 신데렐라 권혜경씨
  • 이인회 기자
  • 승인 2003년 01월 27일 00시 00분
  • 지면게재일 2003년 01월 27일 월요일
  • 11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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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장의 여인' 제2인생 '불꽃'

충북 청원군 남이면 외천리, 옹기종기 모여 있는 농가들 틈으로 소담한 집 한 채가 뽕나무의 호위를 받으며 겨울을 나고 있다.

마치 낯선 객이라도 잠시 들러 주인장의 넉넉한 인심을 맛보라는 듯 '산장의 여인'이라고 씌어진 큼지막한 문패가 반갑게 맞아주는 그 집은 '아무도 찾지 않는 외로운 곳'이 아니었다. 낮은 곳을 터전삼아 나누고 베푸는 산장지기 권혜경(權惠卿·72)씨, 가늠할 수 없는 암덩이와 씨름하며 살고 있다는 것이 믿기지 않을 만큼 그는 씩씩하고 또 의연했다.

'아무도 날 찾는 이 없는 외로운 이 산장에, 단풍잎만 채곡채곡 떨어져 쌓여 있네, 세상에 버림받고 사랑마저 물리친 몸, 병들어 쓰라린 가슴을 부여안고. 나홀로 재생의 길 찾으며 외로이 살아가네….'

50년이 지났어도 귀설지 않은 노래만큼이나 기구하고 파란만장하게 살아 온 시간들은  차라리 한 편의 인생극장, 화려한 조명 아래 한 시대를 풍미한 가수에서 세상만사 찌든 때를 손수 벗겨 내며 당당한 솔로로 살아가는 처녀 할머니의 아직 끝나지 않은 노래는 그렇게 시작된다.

1931년 강원도 삼척 출생인 그는 세무 공무원이던 아버지를 따라 전국을 유람하다시피하며 살았다. 뼈대 있는 양반집 가문에 재력까지 겸비한 터라 남부러울 것 없던 시절, 탁월한 눈썰미에 손재주를 가진 막내딸의 재롱은 화기애애한 집안 분위기를 돋우는 데 충분했다.

그가 초등학교에 입학할 무렵에는 당시 내로라하는 부자들이 모인 경기도 의정부에 터를 잡았다. 그리고 그 곳에서 음악의 길에 서라는 계시를 받았다.

"초등학교 은사 중 시게노부라는 여선생님이 계셨어요. 제 노래를 아껴 주고 다듬어 주신 은인이시죠. 곧바로 부모님을 졸라 노래 공부를 시작했습니다."

동구여자상업고등학교에 진학한 그는 최고의 성악가 이관옥씨로부터 사사를 받는다.

한 달 레슨비만 5000환일 정도로 음악을 한다는 것은 예나 지금이나 녹록지 않은 일이었지만 아버지의 전폭적인 후원에 힘입어 꿈을 키울 수 있었다.

문제는 양반집 규수가 돼 주길 바라는 어머니의 반대였다.

"노래를 하려거든 집을 나가라고 하십디다. 한 때일 줄 알았는데 평생 한이 돼 버릴 줄은 그 때는 미처 몰랐습니다."

노래 실력만큼이나 공부도 잘했던 그는 졸업 후 조흥은행에 입사하며 음악에 대한 욕망을 잠시 접는다.

출중한 미모에 양반집 여식이라는 프리미엄이 보태진 그는 은행장 댁 며느릿감으로 낙점받았지만 결국 평탄치 않은 가수의 길을 선택했다.

"당시 KBS는 은행 바로 옆인 중구 정동에 있었어요. 2기 전속가수를 모집한다는 소리에 귀가 솔깃하더군요. '제 버릇 남 준답디까' 합격하고 나니 은행 일도 할 수 없더군요."

예정된 여자의 일생을 포기하고 '딴따라'라고 손가락질받던 연예계로 발을 들인 그에게 은행장 집 며느리는 용납되지 않았고 어머니와의 갈등은 극에 달했다.

"집에서 쫓겨나 종로구 내수동에 작은 자취방을 얻었습니다. 어떻게 합니까, 노래는 하고 싶고 어머니 반대는 굽혀지질 않고. 그 때 결심했습니다. '평생 결혼은 안한다. 그러나 일류 가수가 되겠다'고."

연습생활 8개월 만에 단아한 그의 목소리에 반한 작곡가 이재호 선생이 곡을 갖고 찾아왔다.

그 곡이 불멸의 히트곡인 '산장의 여인'이다.

음반은 발매 6일 만에 날개 돋친 듯 팔려 나가는 대박을 터뜨렸다.

"어떤 일이라도 정성을 다하라는 아버지의 말씀과 어머니의 얼굴이 떠오르더군요. 눈코 뜰 새 없이 바쁜만큼 돈도 제법 들어옵디다. 내 딴에는 잘했다 싶어 100만환인가를 들고 집으로 찾아갔습니다. '어머니 쓰세요' 했더니 내동댕이치시더군요."

그 일로 다시는 집에 가지 않겠다고 했고 끝내 어머니의 임종에 다다라서야 후회를 했다. 전국에서 그를 부르는 러브콜이 쇄도했고 하루 7회 공연도 불사했다.

몸이 불편하면 의자에 앉아 노래를 불러도 시비 거는 사람이 없을 만큼 그의 인기는 하늘을 찔렀다.

그러나 그것이 화근, 감기 기운이 도는 듯 하더니 이내 피를 토했다.

심장판막증, 그를 그림자처럼 늘 따라다니는 괴소문은 그 때 시작됐다.

"권혜경이 임신했다는 얘기가 돌더군요. 인기가 높아지니 건방져졌다는 욕설도 난무했을 정도였습니다. 돌아서면 배신하는 연예계의 풍토를 뼈저리게 절감해야 했죠."

'호반의 벤치'는 병든 몸에도 공연을 마다할 수 없을 만큼 또다시 그의 주가를  상승시켰다. 그리고 서른 무렵이 됐을 때, 후두암 진단을 받는다.

수술도 항암치료도 마다했다.

"왜 그랬는지 모르지만 죽음 앞에 덤덤했습니다. 두려울 것이 없자 내 가는 날까지 누군가를 위해 살아야겠다는 생각이 들더군요."

4∼5년의 가수 생활을 접고 나자 그에게 펼쳐진 세상은 더 큰 무대로 다가왔다.

교도소와 소년원을 찾아다니며 공연을 겸한 강연을 시작한 것이다. 고통에 몸부림치다가도 그곳에만 가면 열정이 뿜어 나왔다.

산장의 여인이 마이크 하나로 감동을 전하는 전령사로 변신하자 전국에서 주문이 쇄도했다.

소년원에서는 처녀 할머니, 교도소에서는 처녀 어머니로 통하는 그에게 거칠 것은 없다.

교도소를 가면 꼭 사형수부터 찾아 어머니의 품처럼 안아주고 재소자들에게 자신의 인생사를 들려 주며 갱생의 길로 안내한다.

"나 죽으면 그 녀석들이 상주 역할을 해 줄 겁니다. 명색이 어미 자식간 아닙니까."

그가 청원 땅에 둥지를 튼 것은 9년 전의 일이다.

손수 지은 산장의 문턱은 수소문 끝에 찾아드는 전국의 암 환자들로 인해 닳아있고 그는 아픔(그도 현재 암에 맞서고 있다)을 공유하는 이들을 위해 언제라도 두 팔을 벌린다.

"먼저 마음을 다스리라고 충고합니다. 그리고 제 경험에서 우러나온 민간요법을 소개해 줘요. 뽕잎과 솔잎을 달여 식수로 사용하라고."

뽕잎과 솔잎이 얼마나 효과가 있겠냐마는 그의 용기와 의지가 명약이 됐으리라.

그는 가진 것을 아낌없이 퍼 준다.

아버지가 독립군에게 자금을 대주고 어머니가 없는 사람들에게 쌀을 퍼 줬듯이.

소문난 난봉꾼이었던 오빠를 보며 결혼하지 않겠다고 다짐한 그에게는 요즘도 백발이 성성한 청춘들로부터 구애가 끊이질 않는다.

미련 없는 인생, 아직도 그는 하고 싶은 일이 많다.

연예계는 물론 그가 경험한 세상사를 담은 고백록도 쓰고 결식아동을 지원하는 구심체도 만들 요량이다. 물론 위문공연과 강연도 이어갈 것이다.

그가 갑자기 기타 줄을 고른다. 그리곤 세월의 깊이가 고스란히 묻어난 목소리로 가슴 속 깊은 곳에서 '산장의 여인'을 토해 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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