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마당] 12월 구두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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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마당] 12월 구두 이야기
  • 충청투데이
  • 승인 2020년 11월 29일 18시 10분
  • 지면게재일 2020년 11월 30일 월요일
  • 18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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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전배 천안예술의전당 관장

연말이면 대부분 극장에서 클래식 발레를 무대에 올린다. 송년 발레의 백미 호두까기 인형을 필두로 백조의 호수, 잠자는 숲 속의 미녀, 지젤 등 레퍼토리도 다양하다. 우아한 발레리나 자태는 범접 불가한 절대미(絶對美)의 극치다. 그 신비한 커튼 뒤에 도리어 입을 틀어막게 되는 놀라운 상황도 병존한다.

기억하시는가. 대나무 뿌리처럼 매듭진 발가락 흑백사진 한 장. 이루 형언할 수 없는 발레리나 강수진의 울퉁불퉁 일그러진 발은 그녀가 눈물로 참아낸 누적된 시간의 결정체였다. 혼례를 마치자마자 연습장으로 향했다거나 1년에 소비한 토슈즈가 250켤레가 넘었다는 전설은 비현실적 실화다.

발과 관련된 몇몇 이야기. 그라운드의 산소탱크 박지성 축구화 속에 가득 자리한 모질고 거친 평발, 영원한 대한민국 피겨스케이팅 빙상여제 김연아의 성한 곳이 드문 상처투성이 발목, 1998년 US오픈 골프 우승 경기 중 해저드로 향하던 박세리의 구릿빛 종아리와 극명하게 대비돼 눈부시게 드러난 양말 속 하얀 발. 이토록 슬프도록 아름다운 성공신화는 아직도 국민감동으로 고스란히 각인돼있다. 무용수나 운동선수는 물론 세상 누군들 세련되고 멋진 신발과 구두를 갈망하지 않겠는가.

동화 ‘신데렐라’ 주인공의 인연 고리는 아주 작고 소소한 구두가 아니었던가. 자정에 마법이 풀린다는 요정의 경고를 잊고 무도회를 즐기다 부리나케 성을 빠져나올 때 그만 유리구두 한 짝을 떨구었으나 결국은 그녀를 찾던 왕자와 만나게 된다는 해피엔딩. ‘구두’는 본래 기능 이상으로 절절한 이야기소재이자 영원하고 환상적인 인생 소품이라는 가치도 함께 지니기도 한다.

구두는 사람에게 어떤 존재인가. 구두를 얻기 전까지는 잠을 설칠 만큼 선망하다가 내 것이 된 후에는 속절없이 타인의 시선에 존재감을 양보한다. 새 구두는 뒤꿈치를 아프게 하던 불편함이 해소되기까지 적어도 몇 주는 지나야 길이 든다. 탱탱했던 탄력과 도도하게 빛나던 표피 윤기는 세월에 적응하며 저절로 관대해진다. 정작 날렵했던 선은 여기저기 무너지고 가죽은 날씨와 땀에 의해 시나브로 유연해진다. 앞코는 들뜨기 시작하고 뒤축은 걸음걸이를 따라 한쪽으로만 닳아간다. 남자들 구두 분야 관심은 한마디로 귀찮음. 일반화의 오류가 아니라면 구두 하나만을 집착해 착용하는 것은 경우(境遇)가 아닌 것 같다. 두세 켤레 번갈아 신어가며 세상나들이를 시켜줌이 구두 친구들에게 덜 미안한 일이 아닐까 싶다.

이따금 들르는 허름한 구둣방이 있다. 고무줄 동여맨 낡은 라디오가 천정에 걸린 간이 점포다. 원장(院長)으로 불리길 기대하는 주인장의 발광(發光) 솜씨는 신공에 가깝다. 무심코 마주 앉아 있노라면 거침없는 내공에 빠져든다. 지난한 세상사로 인한 푸석함 온갖 수난으로 초췌했던 아픈 과거는 홀연히 사라진다. 기적처럼 병색(病色)에서 완연 회복된다. 외래치료를 마친 구두를 쇼핑백에 넣어 좁은 박스형 컨테이너를 나선다. 대충 걸린 간판이 흔들리며 눈에 들어온다. 그곳은 어엿한 “구두大學病院” 이란다. 아! 어느새 12월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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