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진(秦)나라의 폭정(暴政)에 항거해 영웅들이 다퉈 일어났을 때 일이다. 항우(項羽)와 유방(劉邦)은 진나라의 수도 함양(咸陽)을 먼저 점령하는 사람에게 관중(關中)의 왕으로 봉하겠다는 초(楚)나라 회왕(懷王)의 약속에 따라 각기 다른 길로 함양을 향해 진격했다. 당시 유방의 세력은 항우의상대가 되지 않았으나 책략이 뛰어난 장량(張良)의 도움으로 먼저 함양에 입성해 진의 3세 황제 자영에게 항복을 받아냈다.
그러자 항우는 유방에게 선수를 빼앗긴데다 그의 군사들이 함곡관(函谷關)을 막아 자기 부대의 진입을 저지한 데 대해 크게 노했다.
전부터 유방이 범상한 인물이 아님을 간파하고 있던 항우의 모사(謀士) 범증(范增)은 이번 기회에 그를 없애기로 하고 노기가 가라앉지 않은 항우를 충동질해 다음 날 전승 축하연을 핑계로 유방을 초대해 놓고 기회를 봐서 죽이기로 했다.
이때 항우의 숙부이며 장량의 오랜 벗인 항백(項伯)은 유방이 죽임을 당하면 장량도 무사하지 못할 것을 염려해 밤을 이용해 몰래 유방의 진영으로 찾아가 장량에게 어서 피하라고 알려 줬다.
그러나 장량은 피하지 않고 유방과 함께 만반의 대비책을 세워 다음 날 항우의 진영인 홍문(鴻門)으로 찾아갔다.
항우를 만나자마자 유방은 공손하게 인사를 하고 말했다.
“저는 함곡관 안에 들어온 뒤에 가을 터럭만한 작은 것도 범하지 않고(추호물범:秋毫勿犯) 하찮은 물건 하나까지도 관리에 만전을 기하면서 장군께서 오시기를 고대하고 있었습니다. 어찌 다른 마음이 있었겠습니까?”
뜻밖으로 유방의 공손하고 유약(柔弱)한 모습을 본 항우는 금세 마음이 풀어져 그를 죽이려던 마음이 봄눈 녹듯 사라져 버렸다. 이어서 벌어진 술자리에서도 호구(虎口)에서 가까스로 빠져나올 수 있었다.
이것이 유명한 홍문의 연회(宴會)이다.
성어(成語) 추호물범(秋毫勿犯:가을에 가늘어진 짐승의 털끝만큼도 범하지 않았다)은 이 이야기에서 유래한 것으로 추호무범(秋毫無犯:추후도 범하지 않는다)이라고도 한다.
같은 성어로 추호불범(秋毫不犯:매우 청렴해 남의 것을 조금도 건드리지 아니함, 마음이 아주 깨끗하고 청렴해 조금도 남의 것을 범하지 아니함을 의미하는 말)이라고도 한다.
우리들은 삶에서 어려움이 닥칠 때 추호물범의 인식 속에 유비무환 정신으로 슬기롭게 해결해보자.
<국전서예초대작가및전각심사위원장·청곡서실 운영·前 대전둔산초교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