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변평섭 칼럼]어디 용한 占집 없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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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변평섭 칼럼]어디 용한 占집 없소?
  • 대전매일
  • 승인 2004년 01월 26일 00시 00분
  • 지면게재일 2004년 01월 26일 월요일
  • 21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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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사 회장
지난번 광주의 어느 대학 수능시험장에 '거시기에 바쁘시오. 잉!'이라는 격문이 걸려 있었다.

선배들이 시험을 치르는 후배들을 격려하기 위한 것들이었다.

수험생들에게 '거시기'라는 말은 모든 게 다 포용돼 있다. 초조, 불안, 소망하는 대학의 합격, 친구, 부모의 걱정 등등.

수험생뿐 아니라 '거시기'란 말은 지난해 젊은이들 사이에 큰 유행이 되었었다. 아무래도 이 말을 뜨겁게 퍼뜨린 것은 이준익씨가 감독한 영화 '황산벌' 때문일 것이다.

'황산벌'은 흥행에 크게 성공한 영화인데 이준익 감독은 '거시기'에 대한 번역을 놓고 많이 고심했다고 한다.

사실 영화 중에 계백 장군이 작전을 짜면서 '거시기 한판 붙자'고 하는데 신라의 김유신 장군 측에서는 이 정보를 입수하고 '거시기'가 무엇인지 뜻을 몰라 쩔쩔맨다.

영화뿐 아니라 우리들 언어에서도 '거시기'는 어떤 뜻이 분명 떠오르지 않을 때, 불분명한 상황에서 잘 쓰이는 어휘다. 또 남녀의 섹스를 표현하거나 성기를 은유적으로 말할 때도 많이 쓰인다.

지난해 유난히도 이 말이 유행된 것은 영화 '황산벌' 탓도 있지만 수능시험을 치르는 불안한 고3 학생처럼 정칟경제·사회·외교 등 모든 분야에서 국민들이 느끼며 살아야 했던 초조함 때문이 아니었을까. 그 모든 것에 대한 실망, 분노, 불안 때문이 아니었을까.

이와 같은 상황은 새해가 되어도 변하질 않는다.

그 대표적인 것이 요즘 점치는 사람이 부쩍 많아진 것이다. 그래서 서울에는 점술촌이 생겼고 대전에도 보문산 주변에 '점'집을 나타내는 깃발들이 부쩍 많아졌다.

왜 이렇게 점집이 늘어만 가는가. 어디 용한 점집 없느냐며 여기저기 헤매는 사람들이 왜 이렇게 많은가.

무엇인가 확실한 비전이 보이지 않고 답답한 것이다. 초조하고 불안한 것이다.

'사오정', '오륙도'에서 30대도 직장에서 퇴출당하는 상황이며 '이태백'(이십대의 태반은 백수)이라는 말이 생겨날 정도로 취업난이 심각한 지경이다.

장사가 안 돼 언제 문을 닫아야 할지 모르는 우리의 경제다. 카드빚 때문에 떼강도와 살인이 횡행하는 불안한 사회다. 이민을 떠나려는 충동이 그 어느 때보다 강한 때이다.

정치는 또 어떤 요동을 칠지 모른다.

점집을 찾는 사람들 중에는 정치인이나 그 가족들도 많다고 한다.

이번 총선에 나서야 할지, 물갈이 대상은 되지 않을지… 잠 못 이루는 사람이 많은 것이다.

서양 속담에 '통계학자가 배고프고 점치는 사람이 배부르면 백성은 운다'는 말이 있다. 정말 우리 사회가 그렇게 되는 것은 아닌가.

오죽하면 요즘 들어 '역술인 자격증'을 따서 전문적으로 점술가가 되려는 사람이 부쩍 많아졌다고 한다. 전에는 아마추어 수준으로 재미삼아 사주 보는 법, 관상 보는 법을 배웠으나 이제는 본격적으로 전문 점술가가 되어 인터넷에까지 기업형 점술사이트를 차리는 것이다.

물론 인간은 무척 약하다. 바람에 흔들리는 촛불과도 같고 갈대와도 같다. 어두운 밤길처럼 운명이 두렵기도 하다.

그러나 인간은 강해질 수 있다. 그 강함으로 오늘 우리의 문화가 탄생했고 역사가 흘러오지 않았는가. 따라서 강자로 남을 것인지, 점집 앞을 어슬렁거리는 약자로 남을 것인지, 그것은 전적으로 우리의 자유의지에 달려 있다.

그리고 정치는 국민들에게 믿음을 주고 종교인들은 정신적 평화를 주도록 해야 한다. 이 어려운 시대, 정말 필요한 것은 정치 지도자와 종교인들이 스스로를 불태우는 모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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