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변평섭 칼럼]'도둑맞은 목척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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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변평섭 칼럼]'도둑맞은 목척교'
  • 대전매일
  • 승인 2004년 02월 09일 00시 00분
  • 지면게재일 2004년 02월 09일 월요일
  • 21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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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사 회장
대전이 면에서 읍으로 승격되기 전, 대전천을 사이에 두고 지금의 동구와 중구를 잇는 '까치다리'라 일컫는 징검다리가 있었다.

대전 사람들은 은행동에 있던 큰 은행나무 때문에 '까치다리'를 '은행다리'라고도 했다.

이 무렵 대법원장을 지낸 조용순(趙容淳)씨, 내무장관을 지낸 백한성(白漢成)씨 등이 진잠, 기성에서 이 '까치다리'를 건너 삼성초등학교를 다녔다.

그러던 대전천은 일본 사람들이 늘어나면서 대대적인 하천정비 작업을 하고 천변에 수해를 막는 제방을 쌓았다.

따라서 징검다리에 불과하던 '까치다리'는 철거되고 1925년 신식 다리를 놓았는데 요즘 같은 철근 콘크리트가 아니라 목재를 사용했다. 다리 주변에는 초가집들이 띄엄띄엄 있었고 순대와 막걸리를 파는 주막이 많았다.

다리 이름을 '목척'이라고 한 데는 몇 가지 설이 있다.

하나는 목재를 이용한 다리인데다 다리의 하중을 안전하게 하기 위해 교각 사이에 버팀목을 얼기설기 연결해 놓은 것이 마치 나무자(尺)의 눈금 같았다 하여 목척교라 했다는 것이고, 두번째 설은 우리나라 궁중의 전통으로 매년 2월 임금이 신하들에게 나무자를 하사하여 충성을 확인했는데 비록 지금은 일제 치하지만 임금에 대한 충성을 저버리지 말자는 뜻에서 그렇게 지었다는 것이다.

1931년 대전이 읍으로 승격된 후 어느 해 여름, 목척교는 엄청난 비로 하천이 범람해 떠내려 갈 위기에 처한 적도 있었으나 사이또 야스사브로라는 일본인 읍장을 비롯 대전읍민들이 총동원돼 동아줄로 다리를 묶는 등 사투 끝에 유실을 막아냈다.

그 후 목척교는 대전에 자동차가 조금씩 늘어나면서 다시 콘크리트 다리로 놓아지고 너비도 크게 늘어났지만 이름은 그대로 '목척'이었다.이 목척교가 전국적으로 알려지게 된 것은 1950년 6·25 전쟁이다.

평양 등 이북에서 또는 서울, 인천 등 수도권에서 많은 피난민들이 대전으로 모여들었다. 대전은 호남지방이든 영남지방이든 정세에 따라 피난 가기가 좋은 교통의 요지였기 때문이었다.

피난민들은 형언할 수 없는 혼란 속에서 만약 헤어지면 '대전 목척교에서 만나자'는 것이 하나의 약속이었다. 그래서 목척교는 헤어진 가족들을 기다리는 안타까운 피난민들로 늘 북적였다. 또 이곳에 가면 고향사람들을 만날 수도 있고 헤어진 가족과 두고 온 고향에 대한 정보도 얻을 수 있었다.

말하자면 목척교는 전쟁 중에 '만남의 광장' 역할을 했다. 이와 같은 배경을 가지고 태어난 노래가 안다성씨가 부른 '못 잊을 대전의 밤'.

'가로등 희미한/ 목척교에 기대서서/ 나 홀로 외로이/ 이슬비를 맞으면서….'

이처럼 대전시민의 깊은 애환이 서려 있는 목척교가 1970년대 무모한 개발정책으로 지금의 홍명상가와 중앙데파트가 세워지면서 그 모습이 사라졌다.

뿐만 아니라 20년 후 복개건물을 대전시에 기부체납한다는 계약서가 시청에 보관 중이었는데 감쪽같이 사라지는 어처구니없는 일이 발생하는 등 대전천 복개를 둘러싼 무성한 추측이 난무하기도 했다. 그래서 이 복개건물이 아직껏 대전시에 돌아오지 못하고 개인들 소유로 되어 있다. 더욱 기가 막힌 것은 당시 대전시가 문창동에서 선화동까지 대전천 전부를 50m 폭으로 콘크리트 복개를 하려고 한 것. 이유는 대전 남·북 간선도로망을 확보하겠다는 발상이었다.

이제 대전시는 대전천 복원사업으로 하상도로와 함께 홍명상가와 동방마트도 2020년까지 전면 철거할 계획이라고 한다. 그러면 목척교는 살아날 것인가? 도둑맞은 목척교가 대전시민의 품으로 돌아올 것인가? 정말 반가운 일이다. 그러나 서울시가 청계천을 살리며 엄청난 고가도로도 철거하는 마당에 그 시기를 더 앞당길 수는 없을까? 대전시의 결단을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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