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변평섭 칼럼]캄보디아에서
상태바
[변평섭 칼럼]캄보디아에서
  • 대전매일
  • 승인 2004년 05월 17일 00시 00분
  • 지면게재일 2004년 05월 17일 월요일
  • 21면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1952년 프랑스 유학을 마치고 조국 캄보디아에 돌아온 폴포트는 지하공산당 운동을 벌이다 '붉은 크메르'라는 뜻의 크메르루즈 공산게릴라군을 조직, 1967년 시아누크 정부에 대해 무장투쟁을 전개한다. 그의 머릿속에는 혁명을 통해서 캄보디아 역사에 가장 빛났던 옛 앙코르제국의 영광을 재현하겠다는 야망으로 불탔다.

1년도 못돼 캄보디아 서북부 몇 개 주를 장악한 폴포트는 마침내 1975년 4월 프놈펜에 입성, 혁명정권의 최고 지도자로 3년7개월 동안 피의 통치를 한다.

사유재산과 시장경제는 폐지되었고 수도 프놈펜의 시민은 노동자들을 제외하고 농촌으로 강제 이주시켰다. 공무원, 교수, 의사, 약사 등 전문직 종사자와 중류층 이상은 무조건 강제 퇴거시켰고 숨어 있는 사람을 잡아다 6·25 때 북한 인민군들처럼 손을 보고 손바닥에 노동한 흔적이 없으면 무자비하게 처형했다.

이와 같은 실제 상황을 영화로 만들어 세계를 분노케 한 것이 그 유명한 '킬링필드'가 아닌가. 총알을 아끼기 위해 구덩이에 생매장시키고 우물에 처넣기도 했다.

그뿐만 아니라 강제 이주 과정에서 수십 만명이 굶주려 죽고 농장에서 일하다 영양실조와 병마로 죽어 갔다.

이렇게 폴포트 밑에서 무참히 죽어간 사람이 300만명에 이른다니 '킬링필드'의 고발이 결코 과장된 것이 아니다. 그 영화에 나오는 것처럼 포개어 쌓여 있는 해골과 유골 앞에 서면 소름이 끼칠 수밖에 없었고 그 원혼들을 위해 경건히 머리를 숙였다.

더욱 우리의 마음을 아프게 하는 것은 바로 이와 같은 광란의 주인공들이 1만 5000명 젊은 청소년이었다는 사실이다. 중국의 홍위병처럼 15세 이하의 소년들이 '가진 자'에 대한 증오심과 붉은 혁명 사상으로 무장되어 크메르 루즈군의 잔인한 살인광풍에 앞장섰던 것이다. 그러니 청소년 교육이 참으로 중요하다.

결국 살인마 폴포트는 1998년 베트남의 침공으로 태국 국경 정글지역에서 비참하게 죽었지만 그가 남긴 잔혹사는 영원히 지구촌에서 지워지지 않을 것이다.

바로 그 폴포트가 꿈꿨던 옛 앙코르제국의 영화가 살아 있는 곳이 세계 7대 불가사의로 유명한 '앙코르 와트'다. 정말 그 웅장한 스케일에 압도되는 정글 속의 흑진주라 할까. 어떻게 이런 장엄하고 위대한 예술품이 1000년 이상 밀림에 감춰졌을까.

앙코르 와트의 사원을 세운 사람은 한때 동남아 일대를 정복했던 앙코르제국의 수리야 바르만 2세. 그는 1113년부터 32년간에 걸쳐 16만명을 동원, 대역사를 전개했다. 따라서 돌이 없는 밀림지대로 40㎞나 되는 곳에서 돌을 옮기는 일, 지반이 늪지대로 매우 약한데 엄청난 하중의 돌로 건축을 한 것, 설계도 없이 공사를 한 것 등등이 세계 7대 불가사의로 유네스코가 세계문화재로 지정하기에 이르렀다.

그러나 바로 제국의 영광을 위해 이 엄청난 공사를 일으킴으로써 앙코르제국은 국력이 소진하여 망하고 만다. 폴포트가 앙코르제국의 재현을 꿈꾸며 붉은 혁명을 일으켰다 몰락하듯이.

그런데 사원의 벽에 새겨진 많은 부조 가운데 내 시선을 유난히 끄는 것이 있었다. 왕의 명령으로 전쟁에 나가면서 허허 웃고 있는 전사들이 있고 반대로 그 옆에 울고 있는 전사들이 있는 것이다. 같은 왕 아래서 같은 전쟁터에 나가는데 우는 쪽은 무엇이고 웃는 쪽은 무엇인가.

술에 취해서인가. 제왕의 야심 앞에, 죽어가는 민초의 슬픔 때문인가.

앙코르제국이 멸망하여 정글 속 전설이 되어 버린 것은 바로 이렇듯 울고, 웃는 국론의 분열 때문이 아니었을까.

어쨌든 내 인생에 앙코르와트를 볼 수 있었음은 큰 행운이었다.
 
빠른 검색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