커피홀릭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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커피홀릭①
  • 나재필 기자
  • 승인 2014년 11월 05일 20시 20분
  • 지면게재일 2014년 11월 06일 목요일
  • 21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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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청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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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 커피…. 수천 번의 키스보다 매혹적이고 달콤해. 악마처럼 검고 지옥처럼 뜨거우며 사랑처럼 달콤하구나.” 1980년대 어느 음악다방 뮤직 박스에서 디스크자키가 LP(Long Play)판을 틀어주고 있다. 무스를 잔뜩 발라 앞가르마를 내고 도끼 빗을 뒤에 꽂은 허리케인 박이다. 1분에 33번 회전하는 직경 12인치(inch) 턴테이블 LP판을 닦고, 얹고, 돌리면서 한껏 개폼을 잡는다. 다방 레지는 청마 유치환의 시를 줄줄 외면서 값싼 커피를 팔고, DJ에게 홀딱 반한 여자는 거의 실신 직전이다. 7080세대의 이 어색한 풍경은 저렴한 커피 한잔으로 만끽할 수 있는 아날로그의 위로였다.

▶이제 2·2·2공식은 깨졌다. 커피 프림 설탕 2대2대2…. 그 달달한 오감은 사라지고 이제 텁텁한 풍미와 향미만 남았다. 테이크아웃에서 받아든 컵홀더, 그 뜨거움은 일상의 비등점이자 중독의 발화점이다. 왜 사람들은 쓴맛에 열광할까. 인생에 쓴맛을 본 사람들이 많아져서일까. 아니면, 커피를 마시지 않으면 유행에 뒤처진다고 느껴서일까. 아이러니하게도 사랑하는 것들은 온통 '쓴맛'들 뿐이다. 술, 담배, 커피…. 단맛에서 쓴맛으로 미각이 바뀌고, 후각보다는 시각에 희석되는 세태는 결국 세상 돌아가는 꼴이 쓴맛이기 때문이다. 어쩌면 ‘커피’는 시대사조에 대한 애절한 ‘카피’일 수도 있다.

▶프랑스 소설가 발자크는 살기 위해 글을 쓴 게 아니라, 오직 결혼을 위해 작품을 썼다. 그리고 커피 때문에 죽었다. 그는 서른세 살쯤 폴란드 백작부인에게 반해 청혼했다. 부인은 남편이 죽으면 결혼하자고 약속했다. 발자크는 백작부인을 위무할 지위와 재산이 필요했다. 이때부터 돈 되는 글에 매진했고 잠자는 것마저 아까워 수십 잔의 커피를 마셨다. 그렇게 18년 동안 무려 900편의 사모(思慕) 소설을 썼다. 발자크는 드디어 51세에 꿈에 그리던 그녀와 결혼에 골인했다. 하지만 희극이 될 줄 알았던 이들의 행복은 커피의 뒷맛처럼 허무하게 끝났다. 결혼한 지 5개월 만에 카페인 과다 복용으로 죽고 만 것이다. 그가 평생 동안 마신 커피는 약 5만 잔이라고 한다.

▶고독한 새벽, 초췌한 한기, 뼈마디 저린 삭풍, 그 한복판에 지쳐 쓰러진 겨울을 보며 암갈색 심연의 커피 잔을 든다. 원두 콩을 갈아 핸드드립으로 마시진 않더라도 그 메마른 용해가 훈훈하다. 빈속에 흘러내렸을 때의 달콤한 최음 때문에 새벽이 깨어나고 감각이 깨어난다. 혼자 마시는 커피의 깊이는 고독의 깊이다. 외로울수록 커피 향은 짙고 저리다. 괴로울수록 커피 맛은 쓰고 아프다. 커피를 사랑할 수밖에 없는 이 시대, 이 시간, 우린 각성의 일탈을 꿈꾼다. 달콤한 중독이여 브라보.

나재필 편집부장 najepil@cctoday.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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