甲질하는 사회, 甲질 권하는 시대
상태바
甲질하는 사회, 甲질 권하는 시대
  • 나재필 기자
  • 승인 2015년 01월 14일 19시 31분
  • 지면게재일 2015년 01월 15일 목요일
  • 21면
  • 지면보기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충청로]
▶세상 돌아가는 꼴이 갑갑(甲甲)하다. 그 진원지는 비행기다. 고작 땅콩 몇 알, 라면 한 봉지, 티켓 한 장 때문에 갑(甲)질 횡포가 터지고 있다. '땅콩 회항' 조현아 부사장은 악어의 눈물로 사죄했지만 결국 수형번호 '4200번'을 달고 감방에 갔다. '라면 상무'로 악명을 떨친 포스코 간부는 라면이 짜다며 승무원 얼굴을 때렸다가 여론의 뭇매를 맞았다. 그런가하면 모 의류회사 회장은 항공기 출발 1분 전에 나타나 게이트를 열어주지 않는다며 항공사 직원을 신문지로 때려 '신문지 회장'이라는 낙인이 찍혔다. 또 한명의 기내 진상은 바비킴. 샌님처럼 점잖게만 보였던 그가 술에 취해 난동을 부렸다. 더욱이 여자 승무원의 허리를 끌어안으며 성추행까지 해 '바보킴'이라는 닉네임을 달았다. 참, 요지경속이다.

▶"물건을 못 받겠다고? 죽여 버린다. 씨X. 핸드폰 꺼져있거나 하면 알아서 해." 남양유업 영업사원이 대리 점주(店主)에게 퍼부은 막말과 욕설은 ‘조폭 우유사건’으로 회자됐다. 윤창중 전 청와대 대변인의 꼴값은 국제망신을 샀다. 대통령 수행원으로 미국에 갔을 때 대사관 인턴의 엉덩이를 '움켜쥐듯(grab) 만졌다'가 경질된 것이다. 술 취한 아파트 동(棟)대표는 경비원에게 발길질하고 '백화점 VIP모녀'는 주차요원을 무릎 꿇린 뒤 삽질하다가 ‘갑질의 VIP’로 뽑혔다. ‘상류층’과 ‘밑바닥’의 정신적 감정값이 ‘돈’으로 결정되는 현실이 애석할 따름이다.

▶우린 친절하지 않다. 자신에게 친절하지 않으니 남에게도 친절하지 않다. 특히 약자와 빈자(貧者)에게 친절하지 않다. 우린 IMF경제위기 때 ‘돈’에 대해 굴복했고 IMF를 넘기고 나서는 ‘돈’의 노예가 됐다. 이때부터 말의 길이와 깊이가 짧아졌다. ‘야, 너!’로 불리는 수상한 노동세계는 단답형의 수사(修辭)로 끝난다. 반면, 모욕을 견디는 시간은 길어졌다. 온갖 욕설과 푸대접, 폭행과 굴욕은 진저리쳐질 만큼 야비해졌다. 물론 잘 알고 있다. 일단 ‘밑바닥 노동’은 부려먹기 쉬운 존재들로 채워진다는 것을…. 그래서 일회용품 아닌가. 하지만 어쩌리. 욕을 먹더라도 견뎌야 먹고살 수가 있다.

▶우린 누구나 갑이 될 수도, 을이 될 수도 있다. 왜냐하면 나도 지금 현재 누군가에겐 '갑'이고 '을'이기 때문이다. 감정노동자들을 위로한답시고 호들갑떨기도 하지만 정작 본인이 감정노동자라는 사실은 모른다. ‘웃어도 웃는 게 아닌’ 경비원도 누군가의 아버지이고 누군가의 남편이다. ‘웃어도 눈물이 나는’ 청소부 아주머니도 누군가에겐 세상에 하나뿐인 어머니이고 아내다. 어쩌면 퇴직 후의 우리 모습일 수도 있다. ‘벽’만 바라보며 사는 게 얼마나 힘든 일인지 ‘벽’이 생긴 후에야 깨닫는 게 인생 아니던가. 천박한 갑(甲)질 사회는 우리에게 되묻고 있다. 왜 당신은, 당신에게 친절하지 않느냐고.

나재필 편집부장 najepil@cctoday.co.kr
빠른 검색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